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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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675년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의 아들로 사보이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모친의 섭정 통치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했으며,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다. 구년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활약하며 시칠리아 왕국과 사르데냐 왕국을 얻었고, 사르데냐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 그는 행정, 군사, 내정 개혁을 통해 사보이 공국을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시켰으며, 1730년 퇴위 후 173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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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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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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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
이탈리아어 이름 | Vittorio Amedeo Francesco di Savoia |
출생 | 1666년 5월 14일 |
출생 장소 | 사보이아 공국 토리노 토리노 왕궁 |
사망 | 1732년 10월 31일 |
사망 장소 |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리볼리 성 |
매장지 |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수페르가 성당 |
왕가 | 사보이아 가문 |
종교 | 로마 가톨릭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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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사르데냐 국왕 | 1720년 2월 17일 ~ 1730년 9월 3일 |
이전 통치자 | 카를 6세 |
후임 통치자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
시칠리아 국왕 | 1713년 9월 22일 ~ 1720년 2월 17일 |
이전 통치자 | 펠리페 5세 |
후임 통치자 | 카를 6세 |
사보이아 공작 | 1675년 6월 12일 ~ 1730년 9월 3일 |
섭정 | 마리 잔 (1675년–1684년) |
이전 통치자 |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
후임 통치자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 |
어머니 | 마리 잔 |
배우자 | 안나 마리아 도를레앙 (1684년 결혼, 1728년 사망) 안나 카날리스 디 쿠미아나 (1730년 결혼) |
자녀 | 마리아 아델라이데, 프랑스의 왕세자비 마리아 루이사, 스페인의 왕비 비토리오 아메데오, 피에몬테 공자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마리아 비토리아, 카리냐노 공녀 (사생아) 비토리오 프란체스코, 수사 후작 (사생아) |
2. 유년 시절과 섭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666년 토리노에서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 잔 바티스트 드 뇌무르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부계 조부인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에게서 따왔다. 유년기에는 사보이 공국의 추정 상속자에게 주어지는 전통적인 칭호인 ''피에몬테 공''으로 불렸다. 그는 허약한 아이였기에 건강 관리에 많은 신경을 썼으며, 어린 시절부터 군인에 대한 열정을 보였고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왕자 시절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특별히 만들어진 빵이 오늘날의 그리시니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1675년 부친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사망하자[1] 9살의 나이로 공위를 계승했고, 모친 마리 잔이 섭정이 되었다.
섭정 기간 중인 1680년에는 ''소금 전쟁''이라 불리는 반란이 발생했다. 이는 100년 이상 지속된 소금세에 대한 불만으로 몬도비에서 시작되어 피에몬테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 몬도비 대표단이 토리노로 와서 조약을 체결할 때, 젊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이들을 환대하고 조약에 동의하며 처음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성장한 그는 1684년 친정을 선포하고 모친을 권력에서 배제시켰다.
2. 1. 섭정 정치와 결혼
1675년 6월, 부친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가 토리노에서 40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1],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9세의 어린 나이에 공위를 계승했다.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모친 마리 잔 바티스트 드 뇌무르가 사보이 공국의 섭정으로 선포되어 실권을 장악했고, 궁정에서는 ''마담 로얄''로 불렸다.
섭정 마리 잔은 노골적인 친프랑스 정책을 펼쳤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사보이에 대한 영향력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1677년부터 비토리오 아메데오와 그의 사촌이자 포르투갈의 추정 상속자였던 포르투갈의 이사벨 루이사 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 결혼 계획에는 비토리오 아메데오가 포르투갈로 가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는 마리 잔이 사후 사보이 공국이 포르투갈에 귀속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것이었다.[2] 그러나 비토리오 아메데오 본인이 결혼을 거부했고 사보이 내에서도 반대 여론이 일자, 1679년 5월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3] 결국 혼담은 무산되었다.
성장하면서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모친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는 토스카나와의 혼인을 비밀리에 추진하기도 했으나 프랑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프랑스의 강력한 영향력과 친프랑스 성향의 모친 마리 잔의 의지에 따라 프랑스 공주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1684년 3월,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필리프 1세, 오를레앙 공작과 잉글랜드의 헨리에타의 딸인 오를레앙의 안 마리에게 정식으로 구혼했다.

안 마리와의 결혼 계약은 1684년 4월 9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체결되었고, 다음 날인 4월 10일에는 대리인을 통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와 안 마리는 1684년 5월 6일 사보이에서 직접 만나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을 전후하여 정치적 동맹을 활용해 온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같은 해 친정을 선포하고, 모친 마리 잔을 권력의 중심에서 몰아내어 더 이상 국정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추방했다. 이로써 그는 모친의 오랜 섭정 통치에서 벗어나 사보이 공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3. 사보이 공작 통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어머니 마리 잔의 섭정 이후 직접 통치를 시작하며 사보이 공국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영토 확장을 목표로 삼았다. 그의 통치 기간은 강력한 이웃 국가인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그는 9년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주요 유럽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사보이의 외교적, 군사적 위상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국내적으로는 왈도파에 대한 종교 정책을 시행하고 소금 전쟁 이후 내정 안정과 개혁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3. 1. 왈도파 박해
루이 14세의 권고에 따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685년부터 피에몬테와 사보이 지역의 개신교 분파인 왈도파(보두아)에 대한 대규모 박해를 시작했다. 당시 사보이 공국은 여러 차례의 전쟁과 1679년의 기근 등으로 인해 재정이 파탄 난 상태였으며, 이러한 어려운 상황은 왈도파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그러나 9년 전쟁(1688-1697) 중 잉글랜드 왕국 및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게 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개신교 국가였던 이들 동맹국의 영향으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688년부터 왈도파 박해를 중단해야만 했다. 나아가 1694년에는 관용 칙령을 발표하여 왈도파에게 일정한 종교적 자유를 허용했다.
하지만 이러한 관용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696년 프랑스와 맺은 조약의 결과로, 1698년 루이 14세는 다시 압력을 행사하여 사보이 공국 내 모든 개신교 이민자들을 추방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당시 사보이 공국이 강력한 이웃 국가인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3. 2. 내정 개혁
그의 어머니 마리 잔의 섭정 기간 중 발생한 1680년의 소금 전쟁은 사보이 공국 내정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사보이 공작 시기 도입된 소금세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몬도비에서 시작된 반란은 피에몬테 전역으로 확산될 위험에 처했다. 군대가 투입되어 소요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나, 결국 섭정의 명령으로 토리노에서 몬도비 대표단과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사건의 수습 과정은 젊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직접 국정에 참여하고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섭정 하에서 사보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실상 위성국 상태였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이러한 관계를 끊고 9년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했다. 사보이의 지리적 위치는 프랑스 남부에 제2전선을 열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받았으며, 전쟁 수행 비용의 상당 부분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 등 외국의 보조금에 의존했다.
3. 2. 1. 행정 개혁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행정 개혁' 섹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3. 2. 2. 군사 개혁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통치와 관련된 군사적 활동은 그의 어머니 마리 잔의 섭정기부터 나타난다. 1680년 소금 전쟁 당시, 몬도비에서 시작된 소금세 반대 반란이 피에몬테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사보이아 군대가 투입되었다. 군대는 몬탈도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통해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약 200명의 사보이아 병사가 사망했다.[1]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친정을 시작한 후,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군사 외교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9년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참여했다. 사보이아의 지리적 위치는 프랑스 남부에 제2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받았지만,[1] 독자적인 군사력 유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전쟁 수행 비용의 상당 부분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 같은 외국의 보조금에 의존해야 했으며, 특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에는 외국 보조금이 전체 전쟁 비용의 거의 절반에 달했다.[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초기에는 밀라노 공국 확보를 위해 잠시 프랑스 및 펠리페 5세와 동맹을 맺고, 1701년 키아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1] 그러나 1703년, 그는 다시 입장을 바꿔 대동맹에 합류했다.[1] 이 결정으로 사보이아는 프랑스의 거센 군사적 압박에 직면했고, 1706년에는 수도 토리노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게 포위당하는 토리노 포위전의 위기를 맞았다.[1] 당시 프랑스 군 지휘관 중에는 그의 처남이자 왕비 안 마리의 이복 오빠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도 있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그의 사촌인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과 연합하여 토리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1]

4. 외교 정책과 전쟁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어머니 마리아 조반나의 섭정 기간 동안 사보이는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나, 실제로는 프랑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인 사실상의 위성국 상태였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이러한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는 1684년 프랑스 루이 14세의 조카인 안 마리 도를레앙과 결혼하여 프랑스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1687년에는 루이 14세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오이겐 공 등과 회담하며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루이 14세의 압력으로 1685년 발도파 박해를 시작하기도 했으나[1], 점차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굳혔다.
이러한 독립 추구는 9년 전쟁(1688년-1697년)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1714년)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다.[2] 사보이의 지리적 위치는 프랑스 남부에 제2전선을 열 수 있다는 점에서 양 전쟁 모두에서 동맹국들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었다.[3] 그러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 때문에 사보이는 잉글랜드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등 외국 동맹국들의 재정 지원에 크게 의존해야만 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동맹국을 지원한 결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전쟁을 종결시킨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시칠리아 왕국을 획득하여 국왕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1713년 12월 24일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이는 사보이 가문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외교적 성과였다.
독립 왕국의 통치자가 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외교 관계를 적극적으로 확장했다. 이전에는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로마 등 제한된 국가에만 사절을 파견했지만, 국왕이 된 후에는 외교 관계를 넓혔고, 1717년에는 독자적인 외무부를 설립하여 체계적인 외교 시스템을 구축했다.
4. 1. 9년 전쟁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섭정 아래 사보이는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으나, 실제로는 프랑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위성국과 같은 상태였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이러한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길을 걷고자 했으며, 이는 9년 전쟁과 이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참여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사보이의 지리적 위치는 프랑스 남부에 제2전선을 열 수 있다는 점에서 전쟁 중 동맹국들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사보이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재정을 잉글랜드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과 같은 외국 동맹국들의 보조금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루이 14세의 압력에 동조하여,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685년 피에몬테와 사보이 지역의 개신교도인 발도파(보두아)에 대한 대규모 박해를 시작했다. 하지만 1688년 9년 전쟁이 발발하고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과 동맹을 맺게 되면서 이러한 박해 정책을 중단해야 했고, 1694년에는 관용 칙령을 발표하여 발도파의 종교적 자유를 일부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난 후 1698년, 루이 14세는 1696년에 맺어진 조약을 근거로 사보이 내 모든 개신교 이민자들을 추방하도록 다시 압력을 가했다.
1690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기존의 친프랑스 정책에서 벗어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에 가입하며 반(反)프랑스 진영에 합류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손을 잡고, 그의 사촌이자 뛰어난 군사령관이었던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이탈리아 전선에서 프랑스군과 맞섰다. 그러나 1690년 스타파르다 전투에서 프랑스 장군 니콜라 카티나에게 패배했고, 1693년 마르살리아 전투에서도 다시 패배를 겪었다.
거듭된 군사적 패배 이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프랑스와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1696년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하고 대동맹에서 이탈했다. 이 조약을 통해 그는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인 피네롤로와 카잘레 몬페라토를 돌려받는 실리를 챙겼다. 또한,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의 딸 마리아 아델라이드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고뉴 공 루이와 결혼시켰으며, 또 다른 딸 마리아 루이사는 부르고뉴 공의 동생이자 훗날 스페인 왕이 되는 펠리페 5세와 결혼시켰다. 이러한 정략결혼은 사보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프랑스와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4. 2.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 ~ 1714년)이 발발하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초기에 프랑스 편에 섰다. 이는 그의 두 딸이 각각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고뉴 공 루이 및 그의 동생이자 훗날 스페인의 왕이 되는 펠리페 5세와 결혼한 점과도 관련이 있었다.그러나 사보이는 지리적 위치상 프랑스 남부에 제2전선을 열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신성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들에게도 중요한 대상이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1703년 비밀리에 동맹 측과 접촉했다. 이 사실이 프랑스에 발각되자 그는 공식적으로 동맹 측으로 돌아섰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사보이는 주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의 보조금에 크게 의존했다.
동맹에 가담한 후, 그는 1706년 프랑스군에 포위된 수도 토리노를 구원하기 위해 나섰다. 그의 사촌 조카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명장인 오이겐 공과 함께 토리노 전투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격파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오스트리아의 장군 빌리히 폰 다운 등과 협력하여 사보이 영토 내에서 프랑스군과 싸웠다.
전쟁 결과, 1713년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을 획득하여 초대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1713년 12월 24일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식을 올렸고, 1714년 9월 토리노로 돌아왔다. 그러나 1720년 사국 동맹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헤이그 조약에 따라, 사자 동맹의 반대로 인해 시칠리아 왕국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게 양도해야 했다. 대신 그는 사르데냐 섬을 받아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칭호를 얻게 되었다.
5. 시칠리아 왕과 사르데냐 왕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처음에는 프랑스 측에 가담했지만, 1703년에 몰래 동맹 측과 접촉한 사실이 발각되자 동맹 측으로 돌아섰다. 1706년에는 사촌 조카인 프린츠 오이겐과 함께 프랑스군에 포위된 토리노를 구원하는 데 성공했다(토리노 전투). 이후 종전까지 오스트리아의 장군 빌리히 폰 다운과 함께 사보이 지역에서 프랑스군과 싸웠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을 얻어 시칠리아 왕이 되었다. 그는 1713년 12월 24일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1720년, 사국 동맹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헤이그 조약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넘겨주는 대신, 사르데냐 섬을 받게 되었다. 이 교환을 통해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사르데냐 왕'''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사르데냐 왕국을 성립시켰다.
6. 퇴위와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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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유산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사보이 공국을 유럽의 주요 세력으로 끌어올린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통치는 행정, 군사, 외교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과 문화적 기여로 특징지어진다.
행정 및 군사 개혁
사보이에서 광범위한 행정 개혁이 단행되었다. 1696년, 프랑스 모델을 기반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법을 집행하는 책임을 가진 주지사(intendant)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1697년에는 토지 조사인 페레콰치오네(Perequazione)를 시작하여 교회의 토지 소유와 귀족의 특권을 조사했으며, 이는 1711년까지 대부분 완료되었다. 1717년에는 토리노의 사무국 시스템을 개혁하여 전쟁, 내정, 외교 담당 비서를 각각 임명했다. 또한 1670년대부터 공작 궁전 주변의 토리노에 육군 사관학교, 전쟁부, 조폐국, 세관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행정 구역 건설을 추진했으며, 이 작업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귀족의 영토를 몰수하여 중산층에게 분배하고,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리의 권한을 강화하여 절대 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군사적으로는 1690년에 영토 내에 정예 민병대를 창설했으며, 1714년에는 민병대 시스템을 개편하고 엄격하게 성문화하여 각 지역이 인구에 비례하여 병력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1713년부터는 시칠리아를 획득하며 얻게 된 제한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자체 해군 창설을 시도했다. 그는 대외 전쟁을 통해 숙련된 군대를 확보했으며, 이를 이용하여 세기 말 몬도비의 반란이나 1724년 칠리아노에서 발생한 반세금 폭동을 진압하는 등 영토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했다.
외교적 성과와 영토 확장
어머니 마리아 조반나 바티스타의 섭정 하에서 사보이 공국은 프랑스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실상 위성국 상태였으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9년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모두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하여 이러한 관계를 끊고 독립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사보이의 지리적 위치는 프랑스 남부에 제2전선을 열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했으며, 이를 통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 등으로부터 상당한 재정 지원을 받아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9년 전쟁(대동맹 전쟁)에서는 반 프랑스 측에 서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손잡고, 사촌 조카인 오이겐 공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비록 1690년의 스타파르다 전투와 1693년의 마르살리아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1696년 토리노 조약으로 프랑스와 비밀리에 화해하고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군사 기지였던 피네롤로, 카잘레 몬페라토를 반환받았다. 또한 딸 마리아 아델라이드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부르고뉴 공 루이에게, 다른 딸 마리아 루이사를 부르고뉴 공의 동생이자 훗날 스페인 왕이 되는 펠리페 5세에게 시집보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처음에는 프랑스 측이었지만, 1703년에 몰래 동맹 측과 접촉한 사실이 발각되자 다시 동맹에 가담했다. 1706년 프랑스군에 의한 토리노 포위전이 벌어졌으나, 오이겐 공과 함께 토리노 전투에서 승리하여 도시를 지켜냈다. 전쟁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1713)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을 얻어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사국 동맹 전쟁 이후 헤이그 조약(1720)에 의해 시칠리아를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6세에게 할양하는 대신, 사르데냐를 얻고 '''사르데냐 왕''' 칭호를 인정받아 사르데냐 왕국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보이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고, 그는 외교 관계를 확장하여 1717년에는 자체 외무부를 설립했다.
문화 및 도시 발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그의 출생 도시인 토리노에 상당한 문화 유산을 남겼다. 1697년 프랑스의 유명 정원 설계자 앙드레 르 노트르에게 토리노 왕궁의 정원 조성을 의뢰했고, 비엔나 출신 화가 다니엘 자이테르에게 궁전 갤러리 장식을 맡기고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는 사보이에서 음악 후원을 장려하여 궁정은 당대 여러 음악가들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1713년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후 팔레르모에서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유바라를 발탁하여 토리노로 데려왔다. 유바라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후원 아래 토리노 왕궁, 베나리아 궁전, 스투피니지 사냥 별궁의 개조와 수페르가 대성당 건설 등 중요한 건축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또한 유바라는 마담 궁전 내의 유명한 계단을 설계했으며, 토리노의 도시 개조와 여러 도로 및 광장 건설에도 기여했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그의 가문이 남긴 이러한 건축물들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사보이 왕가의 거주지의 핵심 부분을 이룬다. 여기에는 왕궁, 마담 궁전, 스투피니지 사냥 별궁, 그리고 그의 아내 안 마리의 레지나 별장 등이 포함된다.[2]
그는 토리노 대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여 대학에 1만 권의 도서를 기증하고, 교육에서 예수회를 배제하여 교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세속적인 교육 시스템을 강화하고자 했다.
왈도파 박해그의 통치에는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루이 14세의 권고와 압력에 따라, 1685년 피에몬테와 사보이의 개신교도인 왈도파(Vaudois)에 대한 대규모 박해를 시작했다. 당시 국가는 여러 전쟁과 1679년의 기근으로 재정이 파탄 난 상태였다. 이 박해로 많은 왈도파 교도들이 스위스 등지로 추방당했다. 이후 9년 전쟁 중 잉글랜드 및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동맹 필요성 때문에 1688년부터 박해를 중단하고 1694년에는 관용 칙령을 발표하기도 했으나(1690년에 발도파 귀국 인정), 1698년에는 다시 루이 14세의 요구에 따라 사보이 내 프랑스 출신 개신교 이민자들을 추방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종교적 불관용 정책은 그의 통치에 대한 주요 비판점으로 남아 있다.
8. 자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684년 프랑스의 루이 14세 조카인 안 마리 도를레앙과 정략 결혼했다. 안 마리는 헌신적인 아내였으며, 남편의 혼외 관계를 묵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일부는 요절했다. 장녀 마리아 아델라이데는 프랑스 왕가로, 차녀 마리아 루이사는 스페인 왕가로 시집갔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후계자로 여겼던 아들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천연두로 일찍 사망했고, 결국 막내아들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가 뒤를 이었으나, 부자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또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정부 잔 바티스트 달베르 드 뤼엔과의 사이에서 두 명의 사생아, 딸 마리아 비토리아와 아들 비토리오 프란체스코를 두었다. 마리아 비토리아는 카리냐노 공과 결혼했다.
8. 1. 정실 소생
오를레앙의 안나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다음 자녀들을 두었다.사진 |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자녀 | 비고 |
---|---|---|---|---|
![]() | 마리아 아델라이데 | 1685년 12월 6일 ~ 1712년 7월 17일 | 프랑스 왕세손 루이와 결혼, 3남 | 루이 15세의 어머니 |
해당 없음 | 마리아 안나 | 1687년 ~ 1690년 | 미혼 | 요절 |
![]() | 마리아 루이사 | 1688년 11월 17일 ~ 1714년 2월 14일 | 스페인의 펠리페 5세와 결혼, 4남 | 스페인 국왕 루이스 1세, 페르난도 6세의 어머니 |
![]() | 비토리오 아메데오 | 1699년 5월 6일 ~ 1715년 3월 22일 | 미혼 | 피에몬테 공, 천연두로 요절 |
![]()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 1701년 4월 27일 ~ 1773년 2월 20일 | 술츠바흐의 안 크리스틴, 헤세-로텐부르크의 폴릭세나와 결혼, 총 6남 4녀 | 사보이아 공작, 사르데냐 국왕 |
해당 없음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 1705년 12월 1일 ~ 1705년 12월 19일 | 해당 없음 | 유아기 사망 |
8. 2. 사생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여러 혼외 관계를 가졌는데, 그중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은 유명한 미녀 잔 바티스트 달베르 드 뤼엔과의 관계였다. 그녀는 11년 동안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정부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마리아 비토리아 프란체스카 (1690년–1766년):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디 사보이아-카리냐노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현재 나폴리 공 비토리오 에마누엘레가 그녀의 직계 후손이다.
- 비토리오 프란체스코 (1694년–1762년): 마리아 루크레치아 프란치 디 폰트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참조
[1]
간행물
The Count Of Donnas Dal Val D' Aosta
http://archive.org/d[...]
2021-11-19
[2]
웹사이트
Residences of the Royal House of Savoy
http://www.sitiunesc[...]
2010-09-21
[3]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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